[정치 판벌려] ‘좋은’ 가해자는 불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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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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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오후 서울 은평구 한국여성의전화에서 한국성폭력상담소와 한국여성의전화가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추행 사건' 기자회견을 열었다. ⓒ홍수형 기자 
  • 13일 오후 서울 은평구 한국여성의전화에서 한국성폭력상담소와 한국여성의전화가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추행 사건' 기자회견을 열었다. ⓒ홍수형 기자

  • 자신의 성추행 의혹을 품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해서 들린다. 그 피해자와 연대자들은 성추행과 성희롱을 가능하게 만든 구조를 없애기 위해서 지금도 고군분투 중이다. 

    한 편으로는 나에게도 몇 년 째 사라진 가해자가 있다. 바로 나의 아버지다. 나의 아버지는 좋은 사람이었다. 동네 사람들에게 예의바르고 딸이 하는 일을 지지하면서도 자랑스러워하는 보통의 착한 아버지. 딸이 야간자율학습을 하거나 어머니가 야근을 하면 귀찮아도 기꺼이 밤늦게까지 마중 나와 주는 사람이었다. 

    그런 아버지는 비가 오는 날이나 기분이 안 좋은 날이면 자기 심기를 건드렸다는 이유로 나나 어머니를 때렸다. 오죽하면 비가 오는 날이면 어머니는 나한테 ‘오늘 비 오니까 아버지를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하고 출근을 했을까. 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에게 뺨을 맞았고, 그런 두려움에 항상 아버지 눈치를 봤다. 그리고 대학생이 된 나는 탈출하다시피 집을 빠져나왔다.

    이후 나는 페미니즘을 만나고, 여전히 변한 것 없는 아버지를 마주할 용기를 얻었다. 아버지에게 ‘이곳에 당신의 자리가 없다’고 온 몸을 떨면서도 힘주어 말했던 그 날, 아버지는 집을 나갔다. 사과 한 마디도 없이.

    나는 아버지가 집에 돌아 올까봐 두려워서 빨리 아버지와의 관계를 끝내버리고 싶으면서도 한 편으로는 아버지가 진심어린 사과 한 마디만 했으면 마음의 상처가 많이 아물었을 거라는 아쉬운 바람을 아직도 품고 있다. 그리고 그런 사과를 받고 나서 다시는 똑같은 폭력이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 받고 나면 아버지를 가끔 만나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사과를 한다는 것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혔고 폭력을 휘둘렀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곧, 자신이 ‘가해자’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가해자의 가해 사실 인정과 사과, 책임이 피해자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나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통해 알고 있다. 성별 기반 폭력이 큰 사회 문제인 만큼 가해자들이 사건 이후 어떻게 행동하느냐는 사회와 공동체에 중요한 변화다. 특히 고위 공직자처럼 사회적인 영향력을 가진 사람의 가해 사실 인정과 사과, 책임은 더욱 중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고 박원순 시장의 비서 성추행 사실을 인정하면 그의 공로가 모두 사라지고 ‘가해자’로서의 박원순만 남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고 박원순 시장이 성추행 가해자라고 해서 그가 여성인권을 위해 행동해 온 역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평범하고 좋은 사람도 타인에게 성폭력 피해를 입힐 수 있다. 몰랐을 수도 있고 의도치 않았을 수도 있고 자신의 양심이 외치는 목소리가 귀찮아서 무시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가해자가 평범하거나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면 마치 성폭력 자체가 평범하고 흔한 일이니 가볍다고 말 한 것처럼 여겨지거나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고 가해자를 미화한다고 오해받기도 했다. 가해자의 평범성을 이야기하다보면 ‘왜 재수 없게 나만 걸려서’라고 가해자의 억울함을 불러일으키게 되거나 ‘한 순간의 실수’라는 변명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해자’라는 이름의 무게는 감당이 가능한 것이 되어야 한다. 가해자라는 말, 이름, 정체성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절대 악’으로 상정하면 가해자들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해 죽거나 자신이 가해자임을 절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가해자임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이는 더욱 큰 차별과 폭력으로 돌아온다. 가해의 원인을 가해자의 행동에서 찾지 않고 여성에게 돌리며 직장 내에서 여성을 배제하는 ‘펜스룰’(fence-rule)을 적용하는 것이 그 예시이다.

    성폭력 피해자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것이 아닌 것처럼, 성폭력 가해자도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것이 아니다. 가해자는 피해 사실을 인정하고 책임지고 사과하고 반성하는 방법으로 그 죄를 씻을 수 있다. 죄를 씻는다는 말은 죄가 없었던 일이 된다는 말이 아니라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고 여전히 좋은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는 의미이다. 

    죽음은 처벌이 아니다. 죽음은 책임도 아니다. 죽음은 죽음일 뿐, 책임은 남겨진 모두의 것이 되어야 한다. 가해자가 사라졌으니 사건이 해결되었다는 식의 발상이나, 사적인 일이니 공적인 처리가 어렵다는 식의 발상은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다. 고발자의 피해 사실을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듣는 것부터 시작해 2차 피해 입히지 않기, 무조건 부인하거나 비난하지 않기, 어떻게 함께 책임질 것인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용기가 필요한 때이다. 


    이가현 페미니즘당 서울시당 창당준비위원장.

    출처 : 여성신문(http://www.wome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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