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 ‘비동의 강간죄’ 가로막는 정부·여당을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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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1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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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26일, 여성가족부가 ‘비동의 강간죄’를 검토하겠다고 했다가 법무부가 “계획이 없다”고 반박해 9시간 만에 입장을 철회하는 일이 발생했다. 


현행 법률은 “형법 제297조(강간)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폭행·협박의 정도가 ‘피해자의 반항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하게 곤란하게 하는 정도’에 해당해야 강간죄로 인정하는 ‘최협의설’을 바탕으로 한다.


‘비동의 강간죄’는 강간의 구성 요건을 ‘폭행·협박’이 아니라 ‘동의 여부’로 개정한다는 의미로, 여가부의 제3차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2023∼2027년)에 포함된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 내용이 발표되자마자 법무부에서는 현행 형법 297조 개정을 추진할 계획이 없다고 밝혔고, 여가부도 이를 수용해, 기존의 발표를 뒤집고 형법 개정을 추진하지 않겠다고 전격 발표했다.


성폭력 피해자들의 생명과 안전이 걸린 중차대한 사안이, 그저 철회라는 한마디로 이랬다가 저랬다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강간이라는 단어가 형법에 등장한 것은 1995년이었다. 형법이 제정된 것이 1953년인데, 42년만에 등장한 것이다. 그 전까지는 강간은 ‘정조에 관한 죄’로 규정했다. 강간 피해자가 법정에서 판검사, 심지어 피해자의 변호인으로부터도 강간 가해자와 차라리 혼인을 하라는 훈수를 듣던 시절이었다. 사회적으로 강간에 대한 의식이 현저히 낮았기 때문에 당연히 피해를 당해도 그 사실을 숨기기 급급했다. 


피해자들의 힘겨운 투쟁으로 법률에 드디어 강간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성폭력특별법도 제정되고, 친고죄도 폐지되고, 이제는 부부간의 강간도 인정한 판례가 있을 정도로 제도적인 진일보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왜 여성들은 여전히 불안할까?


2019년 1~3월 전국 66개 성폭력상담소 사례를 분석한 결과 강간 피해 사례 1030건 중 71.4%(735건)는 폭행·협박이 없는 사례로 집계됐다. 이 중에는 강간으로 인정받는 사례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례들도 많다. 재판부에 따라 판결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지금도 인터넷에 성희롱, 성매매, 강간 등을 검색하면 으레 어떻게 하면 유죄를 선고받지 않을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소위 성범죄 전문 변호사와 법무법인들의 바이럴 광고가 따라 붙는다. 어떤 재판부를 만나느냐에 따라 운이 좋으면 유죄가 분명한 사람도 무죄를 선고 받는다. 실제로 1심에서는 무죄였다가, 2심에서 뒤집히거나 반대가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렇다보니 여성들은 여전히 자신이 피해자가 맞는지 검열하게 되고, 수사기관에 찾아가는 것을 망설이게 된다. 


인터넷에는 강간죄의 구성요건이 동의 여부로 개정되면, 성관계를 할 때 각서라도 받아야 하냐는 식의 조롱이 넘쳐난다. 형사 재판의 입증 책임은 피의자가 아니라 검사에게 있다. 오히려 물리적인 폭행, 협박의 여부가 모호할 수록, 증거 확보가 훨씬 어렵기 때문에 정황증거를 더욱 풍부하게 수집하고, 정확하게 해석하기 위한 노력이 수반될 것이다.


비동의강간죄에 대한 일부의 조롱은 서로 합의한 성관계였지만 상대방이 마음을 바꾸어 강간으로 신고를 하게 될 때 그 주장이 재판부에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 안전한 관계와 조건 속에서 잘 소통하고 합의해서 마무리한 성관계가 다음날 한 사람의 변심으로 강간이 되고, 처벌을 받게 된다는 건 기우에 불과하다. 


비동의강간죄를 계기로 우리가 논의해야 할 지점은 행위 결과만을 놓고 ‘너도 동의해서 한 거잖아’라는 식으로 상대방의 의도까지 내 기준에 끼워 맞추었던 폭력적인 문화 자체이다. 우리는 서로가 무엇을 상대방의 동의로 인식했는지, 성관계가 이루어질 때 어떤 조건이 갖추어져야 상대가 동의할 수 있을지와 같이 무엇이 강간이고, 아닌지를 넘어서 어떤 성관계가 안전하고 편안한 성관계가 될 수 있을지를 논의해야 한다.


성적 동의는 단순하게 YES와 NO로 표현될 수는 있어도 그 배경에는 수많은 상황과 조건이 포함되어 있다. 우선 성관계를 하는 당사자들이 서로 터놓고 소통하며 성관계를 합의할 수 있을만한 평등한 관계였는지, 주변인들과의 관계는 어떠했는와 같은 관계의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 또한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동의의 의사가 표현되었는지, 동의의 의사를 서로 확인할 수 있었는지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또한 눈빛이나 표정과 몸짓 등 비언어적 의사 표현이 이루어졌으나 무시한 것은 아닌지, 동의를 했더라도 중간에 중단하려는 의사가 표현되지 않았는지도 중요하다. 상대와의 성관계를 원하는지 스스로 깨달을 정도로 충분히 생각할 시간이 주어졌는지, 주변 상황은 어떠했는지, 성관계를 제안받은 공간과 성관계를 할 공간은 어떤 공간이었는지, 이러한 정보는 충분히 주어졌는지와 같은 내용도 포함될 수 있다. 성관계에 대한 대가가 제시되거나, 혹은 응하지 않을 시 불이익이 예상되지는 않았는지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폭행과 협박이 없어도 심지어 언어로 동의를 표현했다 하더라도 저항하기 어려운 상황, 관계, 조건은 이미 너무나도 많다. 그리고 성폭력 가해자들은 이미 이러한 조건을 이용해서 처벌을 받지 않고, 피해자를 만들어내고 있다.

 

‘비동의 강간죄’는 없지만, 사법부에서는 이미 폭력과 협박을 폭넓게 해석하고 있다. 2005년 대법원은 “피해자가 사력을 다해 반항하지 않았다는 사정만으로 가해자의 폭행·협박이 피해자의 항거를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에 이르지 않았다고 섣불리 단정해선 안 된다”고 판시했다. ‘비동의 강간죄’에 대한 논란이 왜곡되고 부풀려졌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왜곡된 정보들이 비동의 강간죄에 대한 사회적 논의의 성숙을 방해하고 있는데, 정치권에서 이를 부추기고 이용하는 현실이 개탄스럽다.


만약 형법이 개정된다면 개별 재판부의 판례에만 의존하지 않아도 되고, 지금은 피해 사실을 인정받지 못할까봐 두려워 신고조차 하지 못하는 수많은 피해자들이 더 이상 자신을 검열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또한 재판부에 해석에 따라 유무죄가 달라지는 일도 훨씬 줄어들 것이다. 강간죄는 여성 피해자가 90퍼센트 이상인 대표적인 젠더기반 폭력이다. 이를 둘러싸고 소모적인 논쟁을 키우는 것은 여성들의 안전을 위협하고 불안만 가중시킬 뿐이다. 사회적 합의를 핑계로 정작 진짜 합의는 제대로 시작하지도 못하도록 막고 있는 것이 누구인지 묻고 싶다.




- 참고한 글

오세진, 피해자 진술만으로 유죄 판단? ‘비동의 강간죄’를 향한 왜곡, 한겨레, 2023.1.30. 

https://www.hani.co.kr/arti/society/women/1077429.html 

이주빈, 부처간 조율조차 않고 발표했다 철회…‘비동의 강간죄’ 뭐길래, 한겨레, 2023.1.27.

https://www.hani.co.kr/arti/society/women/1077268.html 

장은교, 김유진, 이수민, 최유진, “이 법은 또 사라지는 중입니까”…비동의강간죄 발의 1년, 여전히 계류중, 2023.1.31. 경향신문

https://news.khan.co.kr/kh_storytelling/2021/lawrevi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