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판벌려] 일하는 여자들의 인수인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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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임금차별타파의날인 5월 18일 한국여성노동자회 등 여성노동단체들이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 기자회견을 열고 성별임금격차 타파를 요구하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홍수형기자
나는 몇 달 전부터 페미니즘을 테마로 한 북카페에서 일하고 있다. 반지하의 작은 카페이고, 근처에는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가 있기 때문에 순전히 차를 마시기 위해 오는 손님은 드물다. 우연히 카페에 들어왔다가 입구에 전시된 각종 시위 사진과 카페에 들어서면 보이는 전시된 ‘브라’들, 그리고 일회용품을 쓰지 않아 텀블러로 테이크아웃을 해 주는 독특한 구조 때문에 발을 들였다가 다시 나가는 손님들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공간의 테마를 알고 찾아온 손님이든 단순히 차를 마시러 온 손님이든 최선을 다해 친절한 서비스와 좋은 가치를 제공하려고 한다.
나는 이 곳에서 일하면서 받는 돈이 거의 없다. 그 때문일까? 나는 이 카페에서의 나의 노동의 가치와 나라는 인간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부엌에는 뜨겁고 날카롭고 묵직한 위험한 물건들이 많다. 하루 여섯 시간의 근무시간동안 나는 그 좁은 주방에서 위험한 물건들을 다룬다. 하지만 사람들은 주방에 있는 여성을 위협적으로 느끼지 않는다. 그렇기에 나는 손만 뻗으면 사용할 수 있는 위험한 물건들을 두고도 나를 대하는 무례한 언행을 목격하게 된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카페를 대관하고 나서 영수증 처리를 부탁하는 손님이 있었는데, 그는 내가 전에도 페미니즘 행사에서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페미니즘 행사에서 나를 활동가로 만났을 때와 다르게 앞치마를 입고 계산대에 서 있는 여성 노동자로서의 나를 다르게 대했다. 나는 그가 왜 나에게 무례하게 대하는지 알 수 없었다. 가르치려는 태도, 짜증 섞인 말투로 응대하며 ‘내가 뭔가를 잘못하고 있나?’하는 생각이 앞섰지만 이내 내가 계산대 뒤에 앞치마를 입고 서 있는 젊은 여자이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앞치마는 기능적으로는 위생과 더불어 부엌에서 일하며 튀는 물과 음식물로부터 옷을 보호하기 위한 옷이다. 함께 돌봄노동을 상징하기도 한다. 앞치마가 상징하는 돌봄 노동에는 사람들이 먹을 음식을 만들고, 다 먹은 음식을 치우고 그릇을 설거지하고, 계산을 하고, 맛있게 드시라거나 맛있게 드셨냐고 미소를 띄며 이야기하는 것까지 모두 포함된다. 이러한 노동은 ‘여성’ 노동자가 당연히 할 것으로 기대되는 노동이기도 하다.
앞치마를 입고 노동하는 여자인 나는 시시 때때로 손님들의 화풀이를 받아내야 한다. 어떤 손님은 코로나19 감염사태를 대비해 방문기록을 남기는 절차를 거부하며 대놓고 노려보거나 이죽대고 나와 실랑이를 하려 한다. 어떤 손님들은 아무렇지 않게 반말을 한다. 어떤 손님들은 내가 허용할 수 있는 물리적 범위를 초과해 나에게 가까이 다가와 이야기하기도 한다. 현대 사회에선 나의 감정도 상품이고 서비스이지만, 내 감정의 한도를 초과하는 손님을 만날 때면 정말 온 몸의 진이 다 빠지는 느낌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의 무례함을 지적하거나 언성을 높이거나 화내지 않는다. 언제나 친절하다. 그래야 내가 안전하기 때문이다. 부수적으로는 그럼에도 얼굴을 붉히지 않는 것이 ‘좋은 서비스’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 공간에서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단 한 명의 손님도 소홀히 대할 수 없는 것이 내가 좋든 싫든 가질 수밖에 없는 태도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위력에 의한 성폭력 사건'을 떠올려보자. 이 사건을 대하는 일부 사람들은 피해자가 근무 중일 때 썼던 인수인계서를 가지고 ‘어떻게 피해자라는 사람이 자신이 가해자로 지목한 사람의 인품을 칭찬할 수 있냐’며 고소의 진정성을 의심한다. 사회는 여성성을 착취한다. 여성이 자신의 여성성을 티 나지 않게 잘 활용해야만 일을 잘한다고 칭찬을 받을 수 있고, 손님이나 상사의 비위를 맞추는 일을 할 것을 은연중에 요구받는다. 그렇게 여성노동자는 업무매뉴얼에도 없는 친절과 업무를 시시때때로 강요받으며 심리·신체적 경계를 침해당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나는 오히려 피해자가 인수인계서라는 공적인 문서에 ‘배려’와 ‘자부심’ 등 비서가 수행해야 할 노동을 적어둔 것은 그간 사람들이 ‘당연히 알아서 해야 하는’ 것으로 여겨왔던 감정노동을 공적인 노동으로 구체화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생각한다. 인수인계서는 비서의 개인적인 감정을 적어놓은 것이 아니라 비서가 수행하는 ‘공적인 노동’의 목록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여성 노동자가 수행하는 ‘공적인 노동’의 경계는 직장 상사나 손님에 의해 너무나도 쉽게 침해당할 수 있다.
앞치마를 입고 노동하는 여자로서 나는 알고 있다. 내 신체와 생계의 안전, 그리고 내가 일하는 곳의 무탈한 운영을 위해 웃으며 친절하게 참는 것도 ‘노동’이라는 사실을. 그러나 내가 노동하는 동안 겪었던 침해를 바로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침해들이 없는 일이 되는 건 아니다. 나는 언제든지 ‘노동권’이라는 이름으로, ‘성적자기결정권’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일하는 곳에서 겪은 부당한 무례함과 침해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일터에서 나의 노동권과 성적자기결정권은 따로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박원순 시장을 고발한 피해자의 인수인계서와 고소장에 수많은 여성노동자들의 삶이 들어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피해자가 인수인계서에 쓴 내용과 고소 내용이 상반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가현 페미니즘당 서울시당 창당준비위원장.
출처 : 여성신문(http://www.wome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19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