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 시리즈 논평 - 2] 정치권은 백래시와 결별하라(정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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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23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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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는 여성들이 죽임 당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신당역 사건의 피해자가 숨진 장소에는 버젓이 ‘여성이 행복한 화장실’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여성들은 화장실에서 행복하지 않다. 여성들은 어디에서든 무섭고 불안하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수많은 여성들이  이런 불안에 대해 목소리 높여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였다. 끈질긴 투쟁으로, 우리는 많은 성취를 이루어냈다. 불법촬영이 범죄라는 사실이 사회적으로 널리 각인되기 시작했고, 이에 대한 처벌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관련 법이 개정되었다. 또한 살해나 강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큰 위험한 폭력임에도 경범죄로만 처벌되던 스토킹을 중범죄로 규정하여, 이를 처벌하는 ‘스토킹 처벌법’이 제정되었다. ‘젠더 기반 폭력(gender based violence)’이라는 개념을 법적으로 포괄하는 ‘여성폭력 방지에 대한 기본법’이 제정되는 결실도 맺을 수 있었다. 특히 이 법은 기존에 처벌하기 모호했던 친밀한 관계에서의 폭력, 스토킹, 성희롱, 2차 피해 등 여성들이 겪고 있는 많은 폭력들이 포괄적으로 명시된 기본법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하지만 어떤 여성들은 여전히 불안하다. 법이 있어도 제대로 보호받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스토킹 처벌법에 따르면, 피해자는 접근금지 등의 긴급응급조치나 잠정조치를 요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를 취하기 위해서는 법원으로부터 승인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조치가 내려지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고 그 사이에 무방비로 피해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 잠정조치의 경우, 가해자가 조치를 거부했을 때 이를 강제할 법적 근거도 없다. 또한 피해자가 원치 않으면 처벌하지 않는다는 반의사 불벌 조항 때문에, 가해자가 합의를 빌미로 다시 피해자에게 접근하고 합의해달라고 협박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들은 가해자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서, 원치 않는 합의를 하기도 한다. 


가정 폭력 역시 별도의 특별법이 있지만 반의사 불벌 조항이 있어 스토킹과 마찬가지로 2차 피해에 시달릴 가능성이 매우 높다. 데이트 폭력의 경우에는 가정 폭력이나 스토킹처럼 별도의 특별법이 없어 일반 형법으로 다루고 있으며,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피해자들이 가해자의 협박이나 강요에 의해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탄원서를 제출하거나 합의를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가정 폭력, 데이트 폭력에 대해 제대로 된 처벌이 어려운 이유 중 하나이다.


법원의 낮은 양형도 문제다. "피고인이 범행을 인정하고 반성한다", "피해자와 합의가 이뤄져 합의서가 제출됐다" 등의 이유로 솜방망이 처벌을 받는 경우가 많다. 아내 살해 가해자의 형량은 추가 범행이 없다는 전제 하에 평균적으로 징역 12.8년이다. 상해치사의 경우 5년으로 뚝 떨어진다. 죄질에 비해서 현저하게 낮은 형량이다. 신당역 살인사건의 경우에는 검찰이 구속영장을 청구했지만, 거주지가 확실하고 도주의 염려가 없다는 이유로 법원에서 구속영장을 기각하여 가해자가 스토킹 외의 추가 범행을 저지를 수 있도록 방조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현행법상 구속영장의 발급 사유가 제한적이긴 하지만, 스토킹의 경우 얼마든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접근해서 추가 범행을 저지를 수 있는 가능성이 큰 만큼 법원에서 스토킹 사건임을 고려하여 법규를 적극적으로 해석해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면 막을 수 있었던 사건이었다. 


나도 어떤 남성에 의해 살해당할지 모른다는 여성들의 공포에는 분명히 실체가 존재한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남성이 언제 어떻게 돌변해서 나를 죽일지 모른다는 불안. 어떤 여성도 이러한 불안과 공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남성들도 여성들에게 혐오를 당하고 있다, 남성혐오가 존재한다, 남성도 차별을 당하고 있다'고 아무리 주장해도, 그 주장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 어떤 남성도 일상적인 공간에서 누군가 나를 죽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매일같이 하며 살아가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명백히 성별에 기반한 폭력사건임에도, 정치권에서는 누구 하나 확실하게 이야기 하는 쪽이 없다. 한쪽에서는 ‘젠더 갈등’으로 몰아가면서 지지권의 결집을 시도하고, 다른 쪽은 선거 때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경청할 듯 하더니, 침묵하고만 있다.


정치권에서의 논의가 항상 ‘젠더갈등’으로만 귀결되다보니, 젠더 기반 폭력에서 절대 예외일 수 없는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에 대한 대응은 아예 그 논의를 시작조차 못하고 있다. UN은 1979년 여성차별철폐협약에서 여성 차별을 정의할 때 “basis of sex”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으나, 이후 1993년에는 해당 표현이 “gener-based”로 변경 된 바 있다. 국제사회에서는 여성의 정의를 확대해 나가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젠더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기도 전에 “젠더 갈등”이라는 용어부터 생기고, 약자와 사회적 소수자가 당연한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 마치 진영 간의 싸움처럼 비춰지고 있다. 정치권은 이를 앞서서 진화하기는 커녕 오히려 청년세대를 성별로 갈라치는 전략을 선거 국면에서 누구보다 활발하게 이용해 왔다.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하여 한동훈 법무부장관도 나서서 이 사건의 재발 방지를 당부했다. 야당인 민주당 역시 재발 방지를 약속하며, 구조적 불평등 속에서 젠더 기반 폭력이 근절되지 않는 것에 대해 정치권이 안일했음을 인정했다. 또한 현행 스토킹 처벌법의 반의사 불벌 조항 폐지를 고려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런 사건이 다시 일어나지 않으려면 정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서 ‘재발 방지’라는 단어를 입에 담는 건지 의문스럽다.


정치권은 즉시 백래시와 결별하고, 여성들을 죽이는 구조적 성차별을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고민하라. 본인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싸움에 더 이상 여성들을 이용해서도 안 되고, 갈등이 있는 것처럼 국민들을 속이며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여성들은 성폭력이, 가정폭력이 범죄 취급조차 받지 못하던 시절부터 생명을 건 싸움을 이어오고 있다. 여성들의 절박한 투쟁에 언제까지 동문서답으로 답할 것인가. 얼마나 많은 여성들을 더 희생시켜야 한단 말인가. 


참고한 글.

신상숙. (2019). 여성폭력방지기본법: 운동의 오래된 미래, 정책의 새로운 비전. 여성폭력방지기본법 제정, 평가와 과제 토론집

임민정. 끊이지 않는 데이트폭력 배경은 '솜방망이' 처벌…판결문 79건 분석. 노컷뉴스. 2021년 9월 9일자  https://www.nocutnews.co.kr/news/5621748

변민철, [n번방 사건 2년, 여전히 불안하다] 디지털 성범죄 처벌 법률은, 경인일보, 2022년 3월 23일자  http://www.kyeongin.com/main/view.php?key=20220319010002484

장승주 외, [스토킹 범죄]①신당역 사건, '스토킹'이라는 예고된 불행, 아주경제, 2022년 9월 19일자

https://www.ajunews.com/view/20220919162957749 

남성이 여성보다 많이 살해됐는데요?

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37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