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무엇을 문제로 볼 것인가 - 38여성의날 기자회견 '대통령님, 출생률 말고 자살률을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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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8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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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여성의날 페미니즘당x정치하는엄마들 기자회견 

"여성은 숫자가 아니라 사람이다. 대통령님, 출생률 말고 자살률을 보십시오!"



페미니즘당 성명 전문


국가의 관점에서 저출생과 ‘비혼 트렌드’는 늘 문제였다. 그러나 청년​1) 여성의 관점에서 저출생이나 비혼은 문제가 아니라 인과관계를 포함하는 현상이자 자구책에 가깝다. 여기서 ‘청년’ ‘여성’ ‘문제’를 둔 당사자의 목소리와 사회/국가의 해결책 간 괴리가 시작된다. 무엇을 문제로 볼 것인가, 부터 부딪히는 것이다.


한국은 사회복지의 많은 영역을 가정과 개인에 미루어 국가를 유지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굳이 통계를 대지 않아도, ‘개천 환경을 바꾸자’는 말보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익숙하고, 평범한 사람도 잘 살도록 사회구조를 바꾸자는 말보다는 자수성가 신화가 환영받는다. 이런 분위기에서 사회복지가 자라나기는 어렵다. 그래서 인간에게 필요한 정서적, 물리적 지원은 모두 가정의 몫이 되었다. 자녀가 어릴 땐 부모의 양육 의무에, 자녀가 성장하면 부양 의무에 포함된다. 이 모든 과정에서 출산, 육아, 가난, 폭력의 문제는 ‘집안일’로 불리는 사적 영역이 된다. 그렇게 남아선호사상, 독박가사, 독박육아, 가정폭력, 빈곤의 대물림 같은 사회적 문제는 꾸준한 이슈화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 국가의 영역에서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국가 차원의 노력과 발전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으나, 당사자들이 체감하기엔 여전히 부족하다.


그렇다. 이것은 쌓인 체감의 문제다. 국가를 위해 결혼하고 출산하란 말이 더 이상 먹히지 않는 시대에, 대부분의 청년 여성에게 한국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싶지 않거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없는 나라이다. 취업시장에 발들이는 순간부터, 여성은 채용과 승진의 단계마다 ‘유리문’과 ‘유리천장’에 가로막힌다. 이런 상황에서 추후 닥쳐 올 여성의 고용단절​2) 위험을 줄이는 가장 빠르고 개인적인 방법은 일단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다. 나아가, 당장 내 한 몸 건사하기도 어려운 시대다. 평균 임금을 받으며 일하는 사람에게도 ‘내 집 마련’은 로또에 가깝다. 노동소득만으로 미래가 감당이 안 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며 ‘수저론’, ‘조물주 위에 건물주’를 지나 주식이나 ‘로또 청약’이 각광받고 있다. 이것들의 공통점을 단순하게 보자면 불로소득이다. 

단발적인 지원 정책들은 이 중 어느 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때문에, 많은 청년 여성들에게 비혼과 비출산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경험으로 얻은 교훈이자 자구책이다. 그 청년 여성으로서 힘주어 말하자면, 우리가 체감하는 지금/여기의 문제는 코로나19 재난 시대에 닥친 ‘조용한 학살’이다.


보건복지부 자살 현황 자료에 따르면, 2020년 남성 자살자 수는 8.9% 감소한 데 비해 여성 자살자 수는 4.8% 늘었다(한겨레, 2020.12.13일자). 그 중 2020년 상반기 20대 여성 자살사망자 수는 전년대비 43% 증가하였다(한겨레, 2020.12.03일자). 이 증가폭은 모든 세대와 성별을 훨씬 웃돈다. 보건복지부와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의 분석 결과에 따르면 자살의 전조증상이 되기 쉬운 우울증 비율 역시 20대 여성의 증가폭이 가장 컸다(한겨레, 2020.12.13일자). 전체 자살률만 봤을 때 남성이 여성보다 높고 노인이 청년보다 높은데도 20대 여성 자살률에 집중하는 이유다.


이것이 개인의 우울이 아니라 사회적 문제임을 이미 각 분야 전문가가 지적했다. 코로나19로 장기화된 재난 시국은 노동시장을 중심으로 젠더화되고 계급화된 사회 실태를 적나라하게 까발렸다. 2020년 초, 고용한파에 직격타를 맞은 것은 비정규직과 서비스업에 가장 많이 분포한 20대 여성이었다. 페미니즘 리부트가 물 위로 띄운 젠더화된 폭력과 위협 역시 좀 더 치밀해졌다. 있을 곳이 집뿐일 때 폭력에 가장 쉽게 노출되는 것은 여성과 아이들이었다. 여기에, 국가도 가정도 해주지 못하던 정서적 지원이 비대면을 부른 재난 앞에 끊겼다. 서로 마주보고 끌어안고 다독이는 시간이 사라졌다. 사회적 안전망의 사각지대에서 각자도생하며 버티어 오던 청년 여성들이 재난 앞에서 무너지고 있다.


궁지에 몰린 목소리가 숫자로 드러나자 정부에서 급하게 내 놓은 대책의 효과는 아직 체감하기 어렵다. 그런 상황에서 끊임없이 통계로, 정책으로, 공약으로 소환되는 저출산 대책은 여전히 국가의 입장만 말한다. 2021년, ‘서울시 임산부 가이드’는 출산을 위해 입원하기 전에 가족의 생필품을 점검하고 옷을 정리해두며 밑반찬도 준비하기를 권장했다. 공영방송 뉴스는 사상 첫 인구 자연감소라며 호들갑을 떨고 ‘90년대생 부모’들이 ‘희망’인데 가치관 변화와 코로나19의 경제적 타격이 악재라고 했다(케이비에스, 2021.02.24일자). 이 시국에 이런 관점은 조금 더 꼴같잖다.

문제 해결은 문제를 직시하는 데서 시작한다. 저출생도 국가의 관점에서 문제임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먼저 문제로 삼아야 하는 것, 주목해야 하는 것은 태어난 사람의 숫자가 아니라 청년 여성들의 목소리다. 청년 여성들의 누적된 고통을 국가가 결자해지의 문제로 여기고 있냐는 질문이다. 노동시장과 주거로 대표되는 삶의 질, 출산할 권리도 하지 않을 권리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재생산권, 일상 곳곳에서 일어나는 폭력 등 광범위한 문제가 청년 여성 앞에 쌓여 있다. 문제의 크기만큼 국가에 쌓인 서러움 역시 해결되지 못한 채 자꾸만 커진다. 이것은 코로나19가 불러온 인재이며 심각한 문제다. 이것이 문제다. 무엇이 문제인지, 국가는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2021.3.8.

페미니즘당 창당모임



1) 청년의 범위는 기준에 따라 다르곘으나, 여기서 청년은 저출생 문제에 누군가 희망을 걸고 있는 듯한 90년대생을 기준 삼아 2030 여성으로 한정하겠다. 

2) ‘경력단절’을 의미한다. ‘중년여성의 재취업이 어려운 근본 원인은 여성의 경험이 경력으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므로 여성의 경력단절이 아니라 고용단절이라고 말해야 한다’는 한국여성노동자회의 주장에 동의하여 고용단절로 표한다. 자세한 내용은 한국여성노동자회, [19대 대선 정책제언] 존중받는 노동, 성평등 노동이 실현되는 사회를 위한 제언 (kwwnet.org) 참조.